“내가 과연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동안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 당연한 일을 한 것밖에 없는데, 이렇게 상을 받게 되니 죄송한 마음도 듭니다(…).” 지난해 8월, ‘제5회 성천상’을 수상한 국내 최고령 현역 의사 한원주(93) 선생은 떨리듯 차분한 음성으로 수상소감을 전했다. 인생의 들숨과 날숨이 만들어낸 문장의 호흡, 첫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는 시간, 그 행간에는 무수한 결의 삶의 나이테가 그어져 있다. 사명과 소명을 다해 대의(大醫)로서의 마지막 대의(大義)를 펼치고 있는 그에게 의사라는 직업은 말 그대로 천직이었다. 이처럼 환자의 몸과 마음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남양주의 고즈넉한 숲길을 따라 매그너스요양병원을 찾았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즐겁게 일하니 행복해요. 그래서 마지막(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죠. 환자들과 청록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건강상식도 전하고 글도 읽으며 심신을 건강히 하고 있어요. 하늘이 ‘청’, 땅이 ‘록(상록수)’인데, 여기와 딱 맞는 이름이죠. 환자들이 내 또래고 친구잖아요(웃음). 딴 거 있나요? 어려운 사람 위로해주고 환자를 돕는 게 사명이죠. 우리가 다 살려내진 못해도 도움은 줘야 해요. 봉사는 꼭 돈만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지식과 의술, 사랑을 나누는 거죠. 많이 베풀면 많이 돌아와요.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 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맡은 일 잘 해내면 좋겠어요.”

그는 194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고려대 의대 전신)를 졸업하고 산부인과 전문의로 활약하다가 1959년 미국 유학 중이던 남편을 따라 도미했다. 그곳에서 10년간 머물며 미국 내과 전문의를 취득했고, 귀국 후 개원하여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해왔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위기가 찾아온 건 1979년 여름이었다.

“53살에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엄청난 쇼크였죠. 그때부터 돈, 명예, 삶의 의미가 사라졌어요. 삶의 근원에 대해 질문하게 되더군요. 내 앞에 어려움이 닥치니 봉사의 길이 떠올랐는데, 아버지처럼 병원 문을 닫고 의료봉사를 시작했죠.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버시고 전부 사회에 환원하셨어요. 돈 있는 사람에게는 돈을 받고 없으면 무료로 진료하셨죠. 한센인과 재소자들도 봐주셨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돈은 먹을 만큼만 있으면 되고, 내 기술을 사회에 환원하자고 생각했죠. 죽으면 칫솔 하나 못 가져가니 봉사에 쓰라고 주변에 늘 얘기해요(웃음).”

남편과의 사별 후 나와 타인, 즉 ‘우리’를 위해 최소한의 삶을 선택한 그는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부설 의료선교의원 원장으로 취임해 국내 최초로 전인치유진료소를 열었다. 신체 외에도 환자의 정서와 환경도 치료 영역으로 확대해 생활비, 장학금 등을 지원하며 소외계층의 진료와 자립을 도왔다. 이러한 ‘전인치유’가 해외에 알려지면서 독일 개신교 중앙개발원조처(EZE)로부터 3년간(1988~1990) 예산을 후원받기도 했다. 이는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작은 관심으로도 사람의 살길이 열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달려왔다. 환자가 사회에서 재생할 수 있게 발판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렇게 28년을 전인치유에 헌신하고, 10년 전부터는 이 병원에서 의사로서의 마지막 열정을 다하고 있다.

“병원에서 처음에 제안한 직함은 명예원장이었는데, 끝까지 내과 과장을 고집했어요. 아직 현역이니까요(웃음). 더 늙고 병들어서 못할 때까지는 하고, 그 후에는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돌봐주기로 약속하고 왔어요.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에요. 대개 자기 일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 더 행복하고 건강하죠. 그렇다고 90살까지 하라는 말은 아니에요(웃음). 여건이 되면 하는 거죠. 예전에 아버지께 은퇴하시라고 하면, ‘아침 먹고 차 한 잔 마시고 신분 보고 그다음에 뭐하겠느냐,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이 옳았죠.”

인생의 거울이 되어준 아버지(故 한규상)는 항일투사로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내과의사로서 결핵퇴치운동과 콜레라 예방운동에도 앞장섰다. 닥터 노먼 베쑨(Norman Bethune)처럼 대의의 길을 걸어오신 것이다. 사회와 인간의 병마에 맞서 생의 한복판에 서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의과대학생 시절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의사는 사랑과 지식을 모두 지닌 대의의 길로 가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아버지가 물려준 아름다운 유산이다.

“부모님은 고향 진주에서 미션스쿨인 광림학교에 다니며 청년회와 찬양대 활동을 하셨어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공부하신 아버지가 주모자가 되어 3.1독립선언문을 진주로 가져오셨어요. 3월 18일 장날 12시에 교회 종이 울리자 선언문을 낭독했고, 진주에서도 독립운동이 시작됐죠. 현장에서 체포된 어머니(故 박덕실)는 6개월, 아버지는 1년 6개월 옥살이를 하셨어요. 교사였던 어머니는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해 활동하시기도 했죠. 크리스천 패밀리(외할아버지는 목사, 외삼촌은 의사)에서 일찍이 근대의식에 눈을 뜬 부모님은 여섯 자매 모두를 교육 시키셨어요. 그중 돌아가신 큰언니와 셋째인 제가 의사가 됐죠. 제 아들도 대를 이었는데, 몇 년 후면 은퇴할 나이에요(웃음).”

70년 의사 인생 중 40년을 소외계층과 동고동락해온 그는 삶이 허락하는 한 그들 곁에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 뜻대로 입원실 한 칸을 숙소로 삼아 아침 9시부터 5시까지, 때로는 저녁 근무도 하며 성심성의껏 환자를 돌보고 있다. 세월의 야속함으로 귀는 어두워졌어도 재차 물어가며 상대방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녹내장으로 한쪽 시력을 잃어 오른손이 심하게 떨리지만 왼손의 도움을 받아 문제없이 컴퓨터로 전자의무기록을 한다. 유창한 영어로 강의와 발표는 물론 외국인 진료를 거뜬히 해내고, 매일 2시간 독서하는 습관도 여전하다. 비록 안경에 돋보기를 덧쓰며 더디게 읽어나가지만, 어릴 때부터 읽기와 쓰기를 좋아했다며 현재 읽고 있는 책을 소개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문학소녀였다. 몇 해 전까지는 여름휴가를 반납해 해외 의료봉사도 갔지만, 구순을 넘기고는 국내에만 전념하고 있다. 새로운 지식을 쌓기 위해 의학세미나와 강연에도 꾸준히 참석하고 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면허번호를 대면 이 번호가 맞느냐고 놀란다”며 환하게 웃는다. 월급 300만 원은 고스란히 기부하는 데 쓰이고, 성천상으로 받은 상금도 손녀 김혜인 씨가 구호활동가로 있는 월드비전에 기부했다.

취재 후 숲길을 내려오면서 다시 이 명언이 떠올랐다. ‘소의치병(小醫治病), 중의치인(中醫治人), 대의치국(大醫治國).’ 소의는 질병을 고치고, 중의는 사람을 치유하며, 대의는 국가와 사회의 병까지 치료한다는 말. 신념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의사의 길, 인간의 길 위에서 변함없이 변하지 않고 변화한 삶을 산다는 것은. 올해도 백발의 노장은 움트는 새싹을 바라보며 봄을 맞이한다. 나이는 들어도 늙거나 낡지 않기 위해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내가 과연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을 가슴에 되새기며.

글. 사진/ 김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