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그때의 나, 지금의 내가 있는 곳

강미선,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1996년 7월, 엄마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온 초등학교 6학년의 나는 무척 흥분되어 있었다. 아차산역에 자리한 커다란 통유리창으로 된 건물의 유리문 너머로 미래의 예쁜 발레리나들이 기본기를 배우고 있었고, 나는 그곳에 오디션을 보러 간 것이다.

인천에서 다닌 몇 군데의 무용 학원들과 달리 이곳은 발레만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곳이라 하니 더욱 들떠있었던 것 같다. 원장 선생님을 직접 뵙고 발끝 포인트와 몸의 유연성을 테스트 받은 후, 학원에 와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잠도 못 이룰 만큼 너무 기뻤다. 오디션을 본 그날, 나는 엄마와 함께 길 건너편의 유니버설발레단(이하 UBC)에 가 보았다. 사실 그전까지는 우리나라에 발레단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큰 건물 안에 들어서자 시야에 들어오는 발레 포스터들을 보며 한국 발레단의 존재를 몰랐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큰 스튜디오들과 그곳에서 연습하는 무용수들을 보면서 빨리 발레 학원에서 더 많이 배워 무용수로 성장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천에서 학원까지 편도 2시간 반. 왕복 5시간의 거리를 전철과 지하철, 버스를 갈아타며 다녔지만, 하루하루 발레를 배우러 가는 발걸음은 가볍고 즐거웠다. 하교하자마자 집 앞 전철역에서 엄마를 만나 학교 가방과 발레 가방을 서로 바꿔 들고 전철을 탔던 기억, 전철역 노선을 달달 외울 정도로 매일 장거리를 다녔던 그때의 내가 지금 생각해보면 대견하기만 하다.

유니버설발레아카데미를 다니며 선화예술학교를 알게 되었고, 서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입학시험을 보고 운 좋게 합격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UBC <호두까기 인형>의 1막에 출연할 어린 학생들을 뽑는 오디션에도 운 좋게 합격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있었고, 발레는 내게 점점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주인공인 어린 클라라 역은 아니었지만, 클라라의 친구들, 봉봉춤을 추며 UBC와 함께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자 큰 기회이며 경험이었다.

그때부터 발레리나가 되면 UBC에서 춤추고 싶다고 다짐했다. 선화중학생이 되어서도 UBC 공연에서 학생들의 객원 출연이 필요할 때면 내가 있는 학년 친구들과 나는 늘 발레단과 무대에 섰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돈키호테><라 바야데르><호두까기 인형>…. 매번 좋은 기회로 멋지고 아름다운 무용수들을 코앞에서 직관할 수 있었고, 발레리나에 대한 꿈은 점점 확고해지고 커졌다. IMF 외환 위기로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선화예고에 진학해서 1학년이었을 때, 학원 공연을 보신 故 박보희 총재님께서 유학을 권유해 주셨고, 그분의 도움으로 유학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유학 중에도 해외 발레단에 입단하기보다는 UBC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며 열심히 수업에 임했고, 2002년 키로프발레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발레단에 입단했다.

연수 단원부터 시작해 코르드발레, 드미솔리스트, 솔리스트, 시니어 솔리스트를 거쳐 수석무용수가 되기까지 10년이 걸렸으며 그동안의 시간은 내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해 주었다. 고된 연습과 슬럼프,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었던 날들도 수없이 많았고,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 때도 화장실과 샤워실에서 펑펑 울었다. 그러고는 마음을 다잡고 차근히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리허설을 모두 마친 후 스튜디오에 남아 클래스를 하며 기본기를 다졌고, 밤 10시가 되어서야 발레단을 나가는 날이 많았다.

어둑해진 밤, 밤공기를 마시며 내일은 더 잘하고 싶다는 다짐을 하고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생각난다. 유독 자신감이 없었던 20대의 나는 부족한 것투성이의 발레리나였지만, 욕심과 열정이 가득해 나 자신을 힘들게 했던 것 같다. 주변의 응원과 격려로 자신감을 조금씩 얻고 나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었던 30대. 그제야 나는 무대를 조금씩 즐기고 춤이라는 것을 알아갔다. 그렇게 무대가 즐거워졌고 내가 모든 것을 쏟아부어 무대에 오를 때 관객들께 감동과 울림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며 배우고 알아갔다.

수석무용수가 되어 어릴 때부터 마음속으로 바라왔던 작품의 역할들을 하나씩 맡게 되면서 무대에 오를 때면 행복한 긴장감과 설렘으로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다. 어느새 내 나이 40. 유니버설발레단과 무대는 내 인생의 반을 함께 보낸 곳이 되었다. 어린 시절까지 더하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나와는 떼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발레단에서의 모든 시간은 나를 성숙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젊은 날의 나를 기억하며 느끼고 또 느낀다.

꿈 많던 어린 날의 나, 젊은 열정의 나. 남은 시간이 한없이 소중한 지금의 나. 모든 날의 나를 있게 해준 UBC. 그 존재만으로도 감사하고 이 공간을 너무나 사랑한다. 더 많은 날들이 이 공간에 오래도록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앞으로 얼마나 내가 이곳에 더 몸담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게 허락한 시간동안 발레단에서 아름다운 기억과 행복한 무대를 만들어가며 지내고 싶다.

*선화예술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를 거쳐 키로프발레아카데미 졸업. 한국무용협회콩쿠르 회장상(1997), 전국신인무용콩쿠르 금상(2003), 서울국제무용콩쿠르 여자 시니어 부문 1등(2007), 한국발레협회 프리마 발레리나상(2009). 現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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