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스토리

새로운 희망

신혜광, 건축가

지난해 가을의 이야기이다. 한국의 개천절인 10월 3일은 독일의 통일 기념일이다. 더운 여름부터 완연한 가을이 시작되는 10월까지 베를린에는 공휴일이 도통 없는 탓에 더욱더 반갑고 뜻깊은 휴일이다. 마침 월요일인 휴일, 가족 모두와 산책을 나가는 길을 나서니 부쩍 가을 느낌이 난다. 공기는 으슬으슬 차가워지고, 꽤 많이 떨어진 낙엽에 뒤덮인 거리, 짧아진 하루 햇살. 산책길에 문득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몇 번째 맞이하는 가을인지 하나, 둘 손가락으로 헤아려 본다.

아, 5번 째 가을이다. 이 집에서 사는 동안, 나와 아내는 40대가 되었으며, 아이는 3살이 되었다. 새삼 지난 몇 년 동안 꽤나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싶다. 1년이 365일인 건 이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바뀔 일이 없다. 그러나 그 여러 날들이 만드는 여러 번의 ‘1년이라는 기간’ 중, 유난히 더욱 또렷하게 기억나는 해가 있다. 자신만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태어난 해, 긴긴 학교의 터널 끝에 만난 20살이 되던 해, 축구에 열광했던 2002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가 태어난 해이며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2019년 등등.

우리 아이는 황금돼지띠라는 2019년에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 부모가 되는 것만으로도 기억에 길이 남을 이 해가 코로나19라는 다른 이름으로 기억에 남을 줄 누가 알았을까. 2019년의 시작에 ‘황금돼지띠’라며 그 특별함에 열광하던 우리의 모습은 더 이상 기억에 없다. 하루하루, 매 순간 일상이 바뀌는 속도에 공포감을 느끼고 그저 열심히 적응하며 지나간 순간들만 기억에 남는다.

그 사이, 아이는 하루하루를 지나 현재 3살이 되었다. 코로나고 뭣이고 마냥 누워서 울기만 하던 아이가 이제 제법 사람다운 말을 한다. 스스로 밥을 먹고 화장실도 다닌다.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면, 그럴싸하게 앉아서 즐기기도 한다. 이 아이가 시간을 먹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우리의 시간과 함께 자라고 있었다.  

아내는 결혼 전, 12간지의 동물들을 포스터와 엽서 방식으로 그린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닭과 돼지 그림이 크게 액자로 걸려있다(내가 닭띠, 아내와 아이가 돼지띠다). 처음부터 으레 걸려있던 액자라 그런지 아이는 특별하게 저게 무엇인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번씩 그 액자와 관련해 아이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외국인에게 12간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만큼 힘들다. 그저 ‘그런 게 있어’ 정도로 잘 마무리하곤 하는데, 제법 사람다워진 아이는 이제 엄마와 자신이 같은 동물 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비록 그 뜻을 깊게 생각하진 못하지만 아이에게는 그림 놀이처럼 재미있는 모양이다. 아이는 동물들의 순서도 흥미로워한다. 자꾸 12간지의 순서에 대해 ‘왜’ 그러냐고 되묻는 아이의 질문에 답이 턱턱 막히지만, 올해는 무슨 띠고 내년에는 무슨 띠라는 식으로, 동물의 흉내를 열심히 내며 슬기롭게 헤쳐 나간다. 지난해 2022년이 ‘흑호랑이’띠라며 어흥어흥 열심히 따라 해 본다. 

너무 덥다며 에어컨 타령을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베를린의 쌀쌀한 날씨는 겨울을 앞당긴다. 옷차림은 두터워지고 비도 자주 온다. 세계적으로 이래저래 안 좋은 일이 많은 요즘, 에너지 대란과 환경 문제로 독일의 이번 겨울은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조금만 추워도 펑펑 틀던 난방을 한 번 더 회상하고, 난방을 트는 대신 따듯한 물이 담긴 물주머니를 품에 꼬옥 안고, 옷을 하나 더 껴입는 것으로 대체하는 요즘은, 새해가 시작되면 새로운 희망을 기대할게 될까 궁금해진다. 

2023년은 ‘흑토끼’의 해라고 한다. 이제는 ‘황금돼지띠’, ‘백호랑이띠’, ‘흑토끼띠’ 정도는 되어야 기억에 남는 모양인지, 그냥 돼지띠, 토끼띠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더욱더 좋은 뜻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들이 아닐까 싶다. #아날로그 스토리#새로운 희망#신혜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