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窓 _ 있어 준다는 것 _ 박성희

박성희의 窓-47회

있어 준다는 것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미국 시카고에 있는 한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많지 않은 짐이지만 학교 기숙사에서 짐을 빼 새 일터 주변 아파트로 이사 갈 준비를 하는 아들을 보며 나도 가서 좀 거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사를 하려면 누군가는 짐을 지키거나 소소한 정리를 해야 하는데, 하나라도 손이 많으면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짐을 번쩍 들어 나르거나 할 힘은 없지만, 하다 못 해 뒷정리라도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새 장소에 둥지를 트는 동생을 보러 뉴욕에서 딸도 오겠다고 했다. 나는 굳이 올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말리지도 않았다. 고양이 힘이라도 빌리면 좋을 이삿날이니까.

역시 거의 모든 일은 아들이 했다. 아침 일찍 나가 유홀(이삿짐트럭)을 빌려오고, 장시간 운전을 해 낯선 동네까지 짐을 실어 나르고, 새 아파트 입주 계약을 하고, 다시 유홀을 반납하는 일은 누가 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나와 딸은 그냥 트럭 앞자리에 앉아서 내비게이션을 읽어주거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로드 트립을 하는 기분을 냈고, 새 아파트 주변 마켓에 가서 당장 필요한 식료품을 사다 나르는 정도였다. 그래도 이사의 전 과정을 함께 하니 뭔가 역사를 함께 공유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 돌아온 후 나는 아들에게 “가서 눈에 담고 오길 잘한 것 같아. 상상이 되잖아”라고 카톡을 보냈다. 아들도 “엄마랑 누나랑 보고 갔으니까 진짜 집처럼 느껴져요”라고 답해왔다. 그날의 이사는 그렇게 공통의 역사로 남았다.

단지 함께하겠다는 일념으로 아들의 이사에 관여하고 돌아온 나는 “있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의 표현인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할 때 그 옆에 있어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응원이고, 도움이며, 위로다. 존재한다는 건 또한 책임이기도 하다. 대통령이나 회장을 뜻하는 영어인 ‘프레지던트’의 어원은 ‘앞(pre)’에 ‘앉아있는(sident)’ 사람, 즉 맨 앞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느 조직이건, 누군가가 있어야만 돌아간다면, 바로 그 사람이 가장 책임 있는 리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있어야 한다.’ 사랑한다면, 그리고 책임이 있다면.

바쁜 현대사회에서 모든 자리에 다 나타나며 살 수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적어도 나타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애정과 존경과 책임의 표현일 수 있다. 그동안 수많은 자리에 부재했던 여러 사람들, 또 내가 부재했던 수많은 상황을 떠올리며, 결국 모든 것은 얼마나 마음을 쓰느냐에 달려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친한 줄 알았는데 상갓집에 조문도 오지 않는 친구, 뜻을 함께하는 벗인 줄 알았는데 행사에 코끝도 비추지 않는 동료, 나를 아끼는 줄 알았는데 내게 의미 있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 선배…. 역으로 생각하면 혹시 나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며 반성하게 되었다.

전업주부인 내 친구는 아이들을 뒷바라지한 자신의 가장 큰 공은 ‘거기 있었다는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일하는 엄마인 나에게는 부러운 ‘존재 증명’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부모는 자녀의 일생을 통해 서너 번 꼭 필요할 때가 있다고 하는데, 7살 무렵, 대학 갈 때, 그리고 결혼할 때 정도라고 한다. 물론 내 친구처럼 평생을 붙어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있어야 할 때’ 꼭 있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사람마다 상황과 ‘니즈’는 각기 다르겠지만,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좋을 때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내가 없었어도 아들은 잘 이사했을 것이다. 친구를 불러서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고, 혼자서라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충분히 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나는 그 자리에 ‘없는 엄마’가 된다. 나는 앞으로도 내 가족과 친구와 동료에게, 또 우리 사회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되도록 ‘있어 주는 사람’으로 부지런히 살다 가고 싶다. 아무리 있고 싶어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기에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