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 _ 기적 같은 만남 _ 신성원

신성원, KBS 아나운서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을 바라본다. 나무마다 찬란함을 자랑하던 푸른 잎들은 노랗게 혹은 붉게 물들다가 낙엽이 되어 땅으로 떨어진 지 오래고, 그마저도 이 도시에는 필요하지 않은 쓰레기인 듯 한쪽으로 치워져 있다. 잎을 잃은 가지들은 앙상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며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다. 두꺼운 이불로 바꿔야 하는 쓸쓸한 계절이 돌아왔다.

나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일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있었다. 30대쯤부터는 꼭 아이를 갖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터라 결혼을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결혼이나 출산 같은 문제는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내가, 결혼하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 부부도 당연히 가족이긴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으면 종이 한 장 뒤집듯 남남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급해졌다. 의학적으로 내 나이가 임신 출산의 적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명하다는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예상대로 서둘러 시술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인공수정이니 시험관이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실감이 났다. 의사 선생님께서 하자는 대로 하면 금방 아이가 생길 거라고 믿고 바로 시술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렇게 힘든 과정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채로.

임신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채, 야속한 시간은 흘러갔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러다 분노하기도 했다. 남들은 임신을 쉽게 하던데 내게는 왜 이렇게 어렵기만 한 건지 억울했다. 때로는, 늦게 결혼해도 괜찮다며 젊음에 오만했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자책의 눈물도 흘렸다. 만날 때마다 깊은 한숨을 쉬는 나에게 한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건 시험이 아니에요. 열심히 공부한다고 성적이 잘 나오는… 그런 게 아니거든. 근데 병원에 다니고 시술을 받으면 1등, 2등 성적 나오듯이 당연히 임신이 된다고, 아니 되어야 한다고 엄마들이 생각하는 거 같아. 그냥 마음 편히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세상만사 욕심을 버리고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니. 당시에는 전혀 와 닿지 않는 공허한 말이었다. 오히려 내 잘못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그 시기의 나에게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자신만만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이때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내 몸이 증명하고 있었다. 초겨울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나무들을 보며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들이야 겨우내 잘 버티고 나면 다시 잎이 풍성해질 테지만, 나한테 다시 봄이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되지도 않을 일에 더 이상 시간과 노력과 감정을 투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모든 걸 다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쓰라린 결정이었다.

포기하니 마음이 편해졌던 걸까. 다시 봄이 시작되기 전, 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자연 임신으로. 그리고 그해 늦가을 무렵, 아이는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지금도 막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가의 뺨이 내 뺨에 닿았던 그 감촉,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안녕? 홈런아(태명). 나오느라 고생했어.”

아이와 맞닿았던 그 뺨 위로 감사와 안도와 기쁨의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 아이는 부모에게 기적 같은 순간들을 선물해 주었다. 태어나자마자 그 작은 입으로 온 힘을 다해 처음으로 엄마 젖을 물었던 순간, 누워만 있다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몸을 뒤집는 데 성공했던 순간, 처음 ‘엄마’라고 말했던 순간, 사과를 갈아주니 처음으로 먹어보고는 너무 시었는지 눈을 찡그리던 날도 기억난다. 처음으로 겨우겨우 한두 걸음 걸었던 날, 나는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첫 등원, 첫 졸업, 첫 입학까지. 아이의 인생에서 중요한 모든 첫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올해 초등학생이 된 아이는 얼마 전 처음으로 두발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어제까지 못 탔던 아이가 학교에서 교육받고 오더니 하루 만에 ‘혼자 탔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엄마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해서 따라 나갔다. 아이가 혼자 페달에 발을 올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하나, 둘, 셋” 구령을 붙이더니, 균형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코끝이 찡하고 가슴 한가운데가 뜨거워졌다. 어제는 내가 자전거 안장을 잡고 같이 달려줬었는데, 오늘은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 있다니 감격에 벅차올랐다. 언젠가는 엄마, 아빠의 손을 놓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겠지. 한 바퀴 돌고 온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왠지 어제보다 키도 더 커진 것 같았다.

쓸쓸한 이 계절이 지나고 다시 따스한 봄이 오면 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파릇파릇한 새잎이 돋아나는 나무들 사이를 달리고 싶다.

*1973년 서울 출생.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학사,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방송영상학 석사. KBS 24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1997년~現). 사진전 <신성원의 사진일기>(2009) 개최. 저서로는 <속삭임>(2009). 진행 프로그램으로는 <신성원의 문화읽기><KBS 음악실><KBS 아침뉴스타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