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인화(文人畵)를 차물서정(借物抒情)의 그림으로 정의하고 싶다. 이는 물상에 의지해 성정과 철학을 체현하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그림에는 자신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주의 진리가 섞인 광대한 바다에서 스스로 힘차게 유영하는 물고기가 승천이라도 할 듯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할 뿐이지만, 그 속에 깃든 질서와 원초적 에너지는 마냥 자유롭기만 하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진리이다.

단순하지만 명쾌한 진리를 화필로 승화시켜 화폭에 담아본다. 동양의 문인적인 이미지를 담아 생활 속 안식의 메시지를 찾아본다. 혼탁한 사회, 인간성이 상실된 현실의 구조 속에서 여유와 용서, 너그러움, 나아가 자연에의 은일(隱逸)이 현대인에게는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스스럼없는 자연의 담백한 변화, 그리고 멀리 앉은 구름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천지산하(天地山河)의 협곡이 굽이굽이 흐르는 낙수(落水)마저 호탕하다. 이처럼 자연의 이치는 자신의 호흡으로 생명의 세(勢)를 내어 보이니, 차가운 겨울의 기세에도 매화는 단아하며 오래된 소나무는 장중함으로 침묵한다.

천지자연은 무심(無心)의 행위자이다. 그만큼 자연의 도리는 해 질 무렵 섬돌 위에 내려앉은 천지의 물상이 달빛 속에서도 동틀 무렵을 위해 순환하는 이치이니, 은일한 난초의 낯빛이 그러하고 푸른 활엽을 드러내는 연꽃의 우아함이 그러하다. 대자연의 무구한 원형의 경계, 그 물상의 정신을 좇아 누추한 의복과 헐렁한 화구를 벗 삼아 내려놓은 많은 시간이 있다. 구도의 열정은 마침표를 주지 않는다.

다시,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간다. 결국 작가가 작품으로 표현하는 예술적 함의는 오롯이 물상의 천성에 기대어 그 깊이를 정련한다. 그리고 형태 속에 숨겨진 정신을 체득하며 대자연과의 소통 속에 그 뜻을 둔다. 이러한 번뇌와 순례의 고행이 그저 자연에 노닐어 즐거움으로 전해질 때, 비로소 창작의 특별함은 전통의 한계성을 뛰어넘고 선(線)과 형(形), 그 너머로 자유로운 몸을 푼다.

지난 날 내 화도(畵圖)의 열정이 비단옷을 이기는 홑옷 한 겹, 그 비움의 철학에 있다면 오늘날 예술혼을 사르는 나의 연정은 가장 한국적인 문인화의 절박함, 그 무위적(無爲的) 정서에 있다. 가장 한국적인 먹 선을 표현하는 절박함으로 무위(無爲)가 작위(作爲)를 이겨 내듯 생각의 표일함을 목청껏 소리 내어 본다. 고고한 화도의 순례, 그 구름의 깊이가 하도 깊어 오직 자연에 노니는 이 지극한 연모(戀慕)는 이끼 젖은 고요한 대숲에 마냥 깊어만 갈 것이다. 오늘, 내 거친 병풍 너머로 천지자연의 무심(無心)함을 다할 길 없어 무위적 정서와 조우하길 그리움과 간절함으로 기대해 본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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