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소유’와 ‘갈증’이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책을 좋아했지만, 풍족하게 접하기 어려워 책이 있는 집을 찾아서 온 동네를 돌아다녔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는 책을 소유하고 싶은 갈증이 있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갈증은 ‘책거리’ 그림을 만나면서 내 그림 속으로 녹아들었다. 스승이신 황창배 선생님으로부터 한국화를 배우면서 끊임없이 ‘너의 그림을 그리라’는 주문 같은 가르침에 천착하다가 책거리를 보는 순간, 그것이 온전히 나를 사로잡았다. 그 후로 수년간은 오로지 책거리를 소재로 한 그림만 그렸다. 나의 책에 대한 열망이 투영된 그림에 대해 사람들도 공감했고, 덕분에 좋은 상도 받게 되었다.

나는 <서재로망>이라는 전시명으로 개인전을 열면서 문화유산들을 책거리 속에 녹여 넣은 국보 시리즈를 그렸다. 한국 국보는 블루톤으로, 중국 국보는 레드톤으로 그렸다. 특히 한국 국보 그림에는 책뿐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우리나라 국보들을 컬렉션처럼 그려 넣었다. 이 책거리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우연히 방문한 제주도 본태 박물관에서 이루어진 꼭두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도대체 이 투박하고 단출한 목각 인형들은 무엇인가. 그 인형들의 세상을 달관한 듯한 표정 앞에서 나의 소유와 갈등에 대한 욕망이 모두 허무하게 느껴졌고, 각양각색의 등장인물과 동물들, 상징을 묘사한 꼭두 목각들을 보면서 인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꼭두를 그려 가면서 꼭두에 대한 연구를 심화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꼭두가 상여를 장식하는 용도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로, 마을 잔치를 할 때는 인형극 소품으로도 쓰이는 등 우리와 늘 가까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든 암울한 존재로서 터부시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 꼭두를 ‘일상에서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두 번째 개인전 주제를 꼭두로 하게 되었고, 제목을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으로 붙였다. 그들은 구름을 타고 있기도 하고, 우산을 쓰고 하늘에서 내려오기도 하고, 책 속에서 스윽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그야말로 야단법석인 꼭두를 그리면서 마치 축제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만들었다. 결국 축제도 인생의 한 장면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꼭두와 함께한 전시도 새로운 시도로 나아가는 이경주로 나를 바꾸었고, 이 전시도 호평을 받았다.

나는 꼭두 이후 또 다른 변화를 벽화 작업을 통해 시도하고 있는데, 동덕여자대학교 석사학위 청구 전시에서는 어렵게 작업한 벽화를 선보였다. 이 벽화 작업은 그동안의 모든 작업 중 물리적인 노력이 가장 많이 들어간 것이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이 또한 많은 분이 사랑해 주고 계신다.

이렇게 한국화를 바탕으로 이어진 책거리 그림, 꼭두와 한국화의 만남, 그리고 고대 그림에 뿌리를 둔 벽화 작업까지, 스승님이 그러셨듯이 나는 계속해서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도전에 눈을 돌리며 호기심이 만발하지만, 여전히 강렬한 내 그림들은 꼭두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조형성을 잊어버리고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만 집착한다. 단지 상여를 장식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 전통 목각이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나는 나무로 꼭두를 깎고 조각칼로 다듬어가며 동반자와 위로자의 역할을 하는 꼭두들을 내 그림 속에서 따뜻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나에게 있어서 ‘책’과 ‘꼭두’란 할 일을 다하는 것이고, 버려진 존재에 대한 측은함이다. 잊힌 것에 대한 혹은 잊히고 있는 것에 대한 다시 보기이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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