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황금기였던 빅토리아 시대(1830~1901)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를 정신적으로는 결핍을 낳았다. 이 변혁의 시기, 사회 변화를 견인한 동력으로 작동한 것은 ‘산업혁명’과 ‘진화론.’ 전자는 자본주의·제국주의의 팽창을 가속화했고, 후자는 창조론과 정면충돌하며 물질과 정신, 과학과 종교의 대립 구도를 공고히 했다. 그 경계에서 부표를 잃고 방황하는 인간의 내면은 피폐해지고 자아는 왜소해졌다. 이처럼 억압된 시대, 억압된 자아는 문학이라는 삶의 지층에 다양한 양상으로 발현되었다. ‘억압된 것들은 반복적으로 회귀한다’는 프로이트의 명제처럼. 특히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가 침전된 심층 텍스트에 로맨스라는 표층 텍스트로 구조화된 ‘고딕 소설’은 잠재된 욕망과 무의식에 천착해 시대와 인간을 담아냈다.

고딕 소설은 이성주의(합리주의),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고 감성, 비합리성, 주관성, 환상 등에 무게중심을 둔 낭만주의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 호러스 월폴의 <오트란토의 성>(1764)을 그 시초로 보며, 고딕 소설이라는 용어도 작가가 제2판에 붙인 부제 ‘고딕 이야기(Gothic Story)’에서 유래한다. 이후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1886),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1891) 등이 출간되어 대중성을 얻는다. 그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상에서 탈피해 여성의 존엄성과 주체성의 회복을 역설한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1847)도 이와 궤를 함께한다. 작품의 배경이 된 ‘손필드’ 저택은 장르적 특성인 공간의 폐쇄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억압과 고립을 상징하는 그로테스크한 공간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1847)에 등장하는 ‘워더링 하이츠’ 저택, 히치콕 감독이 영화화한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1938) 속 ‘맨덜리’ 저택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공간에 대한 불안이 19세기와 20세기 여성문학을 지배”하는 경향으로 나타났으며 “봉쇄 이미지는 여성 작가 자신의 불편함, 무력감, 기묘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다는 공포”(a, p.198)를 투영한다.

기괴한 존재와 기이한 사건, 초자연적 현상, 중세 고딕 양식의 건축물, 음울한 분위기 등 고딕물(Gothic fiction/horror)의 전형성은 빅토리아 시대를 통과하며 견고해졌는데 이는 오늘날 스릴러, 공포, SF 장르의 모태가 된다. 그중 고딕 소설의 백미, 흡혈귀 소설의 원형인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의 <드라큘라>(1897)는 흡혈귀의 대명사 ‘드라큘라(Dracula)’를 탄생시켰다(‘왐피르 공(Prince Wampyr)’, ‘The Un-Dead’를 거쳐 ‘드라큘라’로 제목 설정). 죽었지만 죽지 않은(Undead) 이 불멸의 캐릭터는 수많은 작품에 차용·재해석되었는데, 최근에는 브로드웨이 초연(2001)의 뮤지컬 <드라큘라>(프랭크 와일드혼 작곡)가 국내 진출 후 5번째 시즌(10주년)을 맞이해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원작을 각색한 뮤지컬에서는 드라큘라와 미나가 적이 아닌 연인 관계를 맺으며 불멸의 사랑을 그린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판타지 로맨스로 재탄생한 것. 뮤지컬은 태생적으로 서사의 공백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원작의 파격적인 상상력을 구현해 낸 감각적인 무대언어로 시청각적 만족도를 높였다. 드라큘라의 악마성(외형·성격)을 강조한 원작에서는 그가 서사 전면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주로 존재로서 존재하지만, 뮤지컬에서는 매력적인 외형의 로맨티스트가 되어 캐릭터의 비일상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내면의 풍경까지 내보인다.

서간체 양식의 소설 <드라큘라>는 주인공들의 편지, 일기, 일지, 전보, 신문 기사 등으로 서사를 전개하는데, 각 인물의 시점이 반영된 의도적인 텍스트 배열은 플롯의 기능과 함께 사건의 객관성을 확보한다. 현실을 담보로 한 환상, 환상에 투과된 현실은 낭만성과 사실성으로 응집된 소설적 진실과 마주한다. 이러한 현실과 환상의 중첩은 작품의 이중성을 표면화하며 여기서 인물의 양면성(양극성), 경계의 시대(세기말)는 비평과 해석의 폭을 더욱 확장한다. 이 작품은 트란실바니아(現 루마니아)의 고성에 살고 있는 드라큘라 백작의 흡혈 대상인 ‘미나 머레이’(하커 부인)와 ‘루시 웨스텐라’를 서사의 중심에 놓는데, 두 인물은 구시대적 여성과 신여성에 대한 담론을 형성한다. 이상화된 여성(수동성)으로 인식된 루시는 흡혈귀가 된 후 관능적인 여성(능동성)의 위치에서 제거되고, 가정교사로 지성미를 겸비한 미나는 “남자의 뇌-큰 재능을 가진 남자들의 뇌-에 여자의 심장”(b, p.433)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그녀는 사건 해결의 주체적·결정적 역할(능동성)을 하지만, 드라큘라 제거 후 ‘집안의 천사’(수동성)로 복귀하면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존속된다. 전복된 여성성과 해방된 삶을 완전히 보여주진 못한 것. 이처럼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는 데 한계를 보였지만, 미약하나마 앞으로 내디디려는 발자국의 흔적은 엿볼 수 있었다.

영웅 서사의 구조를 취한 이 작품은 권선징악의 주제 외에 페미니즘, 탈식민주의(제국주의), 경계와 탈경계의 층위로도 읽힌다는 점에서 재미와 의미를 더한다. 그렇다면 드라큘라의 상징적 함의는 무엇일까. 해석의 다양성이 있지만, 내면화된 불안의 근원을 드라큘라라는 악마성으로 치환한 것은 아닐까.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도 존재했지. 독일 전역과 프랑스, 인도, 케르서니스(오늘날의 말레이반도-옮긴이)에 존재하고, 이곳에서 너무나도 먼 중국에조차 존재해 사람들은 오늘날 그자를 두려워하고 있다네. 그자는 광포한 아이슬란드의 전사들, 악마가 낳은 훈족, 슬라브족, 색슨족, 마자르족(헝가리인-옮긴이)의 자취를 따라다녔다네.”(b, p.441) 소설에서처럼 시대는 수많은 타자를 만들어냈다. 차별은 차이에 기인하며 타자화의 극단은 혐오와 배제의 역사를 반복한다. 이제, 경계 안팎의 나와 타자가 화해할 때다. 탈경계적 인식과 실천으로. 경계는, 한계이면서도 가능성이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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