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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홍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에 가다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2023년 06월

⊙ “이곳은 70여 년 전 선배 전우들이 목숨을 걸고 오르내린 전투 현장”
⊙ 6·25 전사자·실종자 미수습 유해 13만5000구
⊙ 국군유해발굴감식단 복무하는 병사들은 모두 지원병
⊙ “선배들의 흔적을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노력… 사명감 하나로 임하고 있다”
⊙ 국유단, 국군 전사자 유해 1만1313건 발굴… 신원 확인은 209건(1.84%)
⊙ 다부동에서 발견된 국군 전사자의 삼각자, 〈태극기 휘날리며〉 모티브 돼
⊙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전사자 유해발굴감식 전문부대 운영 

 

 

백마고지 같은 참호에서 발굴된 고 김용일(왼쪽) 이등중사와 고 편귀만 하사. 이 둘은 어두캄캄한 땅속에서 70년을 함께했다. 사진=국방부


총 대신 삽과 붓을 들고 흙먼지를 들이마시며 땅을 파헤치는 군인들이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단장 이근원) 소속 장병들이다. 이들은 70여 년 전 자유대한민국을 위해 전사(戰死)했으나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선배 전우를 찾기 위해 격전이 벌어졌던 고지(高地)를 찾아다닌다.
 
6·25전쟁 당시 국군 전사자 수는 13만7899명. 이 중 유해가 수습돼 현충원에 안장된 수는 2만9202위. 정전(停戰) 직후 실종자를 포함해 수습되지 않은 유해는 약 13만5000구이다.
 
2013년 6월 21일 강원도 인제군 광치령 인근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장병이 도솔산 전투에서 전사한 국군 추정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완전 유해이다. 사진=조선DB

 

 

 

6·25전쟁 초기 국군은 전사자에 대한 장례 절차나 시신 처리 지침이 없었다. 1950년 9월이 돼서야 육군 병참단에 ‘묘지등록대’를 만들고는 ‘화장(火葬) 트레일러’를 도입해 전사자 시신을 화장하기 시작했다. 전투 현장에서는 모든 유해를 화장할 수 없었기에 주로 임시 매장(埋葬)을 했다.
 
전황이 호전되면 화장한 유해를 본가로 봉송하거나 부산 동래 범어사나 금정사에 안치했다. 본가로 돌아간 유해의 수는 관련 기록이 없어 확인조차 할 수 없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인 1953년 10월에는 대구시립박물관을 중앙봉안소로 개조해 범어사·금정사의 영현(英顯)을 안치했다. 1956년 국군묘지(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를 조성하고 대구 중앙봉안소에 있던 영현을 동작동에 안장했다.
 
 

 


  3년짜리 限時 사업으로 시작
 

2022년 12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6·25 전사자 발굴 유해 5위의 합동 안장식이 열렸다. 고 김용일 이등중사, 송병선 하사, 편귀만 하사, 장기수 일병, 정준언 일병의 영현이 봉송되고 있다. 사진=조선DB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하 유해발굴사업)’은 2000년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 중 하나로 육군본부가 3년간 실시하는 한시(限時) 과제(29개 지역 발굴)로 출발했다. 유해발굴사업이 성과를 내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자 2003년 7월 정부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을 영구(永久) 사업으로 결정했다. 2004년 4월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 유해발굴과를 설치했고 2007년 1월에는 기존 조직을 확대 발전시켜 국방부 직속 유해발굴감식단을 창설했다.
 
국유단은 유해발굴사업을 시작한 2000년 이래 지난해까지 유해 총 1만3121구(국군 1만1313구, 유엔군 32구, 북한군 773구, 중공군 1003구)를 발굴했다. 현재까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 유해 중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는 209명(2023년 4월 기준)이다.


 

2011년 6월 22일 오후 강원 양구군 ‘피의 능선’에서 발견된 국군 전사자 유해. 두개골 오른쪽에 구멍이 나 있다. 사진=조선DB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2km 떨어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 3개 사단과 맞섰던 다부동 전투(1950년 8월 1일~9월 24일)가 벌어진 곳이다. 55일간 치러진 이 전투에서 아군 1만여 명이 전·사상 피해를 보았다.
 
국군이 다부동에서 결사항전한 이유는 이 지역을 적에게 내주면 대구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다부동을 빼앗기면 지형상 아군은 남쪽으로 10km를 후퇴해 방어선을 펴야 했다. 이렇게 되면 대구가 적 화포 사정권에 들어갔다. 다행히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유지한 덕분에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이 성공했고 이후 북진의 계기가 마련됐다.
 
2000년 4월 13일 칠곡 다부리에선 6·25전쟁 당시 전사한 국군으로 추정되는 백골이 웅크린 모습으로 발견됐다.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 1호 유해였다. 유해와 함께 호루라기, 빗, 만년필, 몽당연필, 삼각자가 나왔다. 사지는 뒤엉켜 형태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낡을 대로 낡아 헐거워진 군화 속에는 발가락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소련제 TT 권총 탄알이 발견됐고 두개골은 부서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무릎 꿇린 채 적에게 확인 사살당한 유해였다.
 
 


  노란 삼각자에 쓰인 세 글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된 최승갑 하사의 삼각자 유품. 사진=조선DB

 

 

손바닥 크기의 노란색 삼각자에는 세필(細筆)로 최승갑(崔承甲)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50년 만에 빛을 본 백골은 17연대 소속 고(故) 최승갑(1924년생, 전사 당시 26세) 하사였다. 최 하사는 국군 수도사단(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에 배속돼 다부동 전투의 한 국면(局面)인 ‘369고지 전투(1950년 8월 6~12일)’에 투입되었다. 1956년 최 하사 유족은 최 하사의 유해를 찾지도 못한 채 전사 통보를 받았다.
 
369고지에서 유해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최 하사의 아내 엄정호(당시 75세)씨가 유해 발굴 현장으로 왔다. 아내는 유품인 호루라기를 쥐고는 “(전쟁 나기 일주일 전에) 휴가 올 때 차고 나왔다”고 했다. 유골을 감싼 한지(韓紙)를 펼치자 남편의 조각난 두개골이 드러났다. 엄씨는 서글프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제라도 만나서 다행이다. 백골이라도 봐서 좋다. 좋은 데로 가시라”고 했다.
 
최 하사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는 ‘슈퍼임포즈(superimpose) 기법’이 동원됐다. 엑스레이를 이용해 유해를 3차원 입체 분석으로 재구성한 뒤 유해와 함께 출토된 유품, 유해의 해부학적 특성, 가족 증언, 전사자의 생전(生前) 사진 등과 비교해 신원을 확인하는 기술이다. 최 하사의 남동생이 보관하고 있던 최 하사 사진과 369고지에서 발굴한 최 하사의 아래턱뼈를 대조해 동일인임을 확인했다. 50년 만에 사랑하는 아내 품에 안긴 최 하사는 2000년 7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최승갑 하사의 사연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4)의 모티브가 됐다. 최승갑 하사의 삼각자는 영화에서 동생(원빈)의 이름이 적힌 형(장동건)의 만년필로 각색됐다.
 
 

 


  61년 만에 재회한 형제
 

국립서울현충원에 함께 잠든 호국 형제 고 이만우 하사와 이천우 이등중사. 사진=국방부

 

 

 

고 이만우(1929년생) 하사와 고 이천우(1933년생) 이등중사는 형제다. 경북 청도가 고향이다.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27일 형 이만우 하사는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입대했다. 한 달 뒤인 9월 22일 동생도 홀어머니를 남겨두고는 대구로 달려가 자원입대해 북진 대열에 합류했다.
 
형은 국군 1사단에 배속돼 다부동 반격 작전에 이어 서울수복 작전에 투입됐다. 국군 7사단에 배속된 동생 이천우 이등중사도 서울수복 작전에 참가했다. 형제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평양탈환 작전에도 함께 나섰다. 당시 국군 1사단과 7사단은 평양 입성을 두고 선두 경쟁을 벌였다. 평양을 점령한 1사단은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며 운산 전투를, 7사단은 평양 북동쪽으로 진출하며 개천·덕천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하자 1사단은 평북 박천을 거쳐 사리원으로 후퇴한 뒤 임진강에서 재반격을 시도했다.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벌어지자 형 이만우 하사는 수세(守勢) 국면에서 용전분투(勇戰奮鬪)했지만 1951년 5월 7일 봉일천 전투(경기 고양)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동생이 속한 7사단도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 한강 이남 오산~태백선인 강원 영월까지 후퇴했다. 영월지역 전투에서 다친 이천우 이등중사는 치료후 1951년 3월 부대로 복귀했다. 이후 평창 하진부리 전투, 인제 풍암리 전투에서 승리하며 북진을 거듭하던 중 1951년 9월 25일 강원 양구 백석산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형은 전사 직후 시신이 수습돼 현충원에 안장됐지만 동생은 찬서리, 비바람을 맞으며 59년 동안 홀로 남겨져 있었다. 2010년 9월 27일 세상에 다시 등장한 동생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군화 끈으로 묶은 인식표를 곁에 두고 있었다. 인식표에는 군번과 이름(0154595 LEE CHUNWOO)이 각인돼 있었다. 국유단은 유일한 식별 표식인 군번과 이름을 바탕으로 유족을 찾아냈다. 친조카의 DNA를 확보해 대조한 뒤 유해가 이천우 이등중사임을 확인했다.
 
형제는 용감했다. 화랑무공훈장을 형은 한 번, 동생은 두 번이나 받았다. 형은 입대 후 전사할 때까지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1500km를, 동생은 1900km를 걷고 뛰었다. 형제는 헤어진 지 61년 만인 2011년 6월 재회했고 호국(護國)의 형제로 지정돼 국립서울현충원에 나란히 안장됐다.
 
 

 


  DMZ 발굴할 유해 많아


6·25 전사자 유해 발굴은 산 정상이나 고지, 능선 등 격전이 벌어졌던 곳에서 이뤄진다. 주로 아군(국군·유엔군)이 패전해 아군 전사자 시신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곳들이다. 개발이 이미 많이 진행된 종심(DMZ 이외 지역) 지역에선 유해 발굴이 쉽지 않다. 반면 비무장지대(DMZ)처럼 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보존 상태가 양호한 곳은 아직도 발굴할 유해가 많다고 한다.
 
6·25 전사자 유해 발굴 감식은 크게 ▲발굴 준비 ▲발굴 ▲감식 ▲신원 확인 단계로 나뉜다. 발굴 준비 단계에서는 ①전투기록분석(전쟁사 분석, 전투 흔적 탐색) ②현장 탐사(참전용사 증언 및 주민 제보) ③발굴 지역 선정(발굴 책임 부대 선정 및 발굴 요원 순회교육)이 이뤄진다. 발굴 단계에서는 ④개토식 ⑤발굴 ⑥수습 ⑦약식제례 ⑧임시봉안이 진행된다. 임시봉안된 유해는 국유단 중앙감식소로 이송돼 정밀 감식을 거친다. 이후 국유단이 확보한 전사자 유가족 DNA와 대조하며 신원을 확인한다.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
 
  6·25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미처 수습되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산천에 홀로 남겨진 13만여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찾아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는 호국보훈 사업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 무한책임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마지막 한 명까지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유가족 DNA 시료 채취 참여(전사자 신원 확인 시 포상금 1000만원)
  채취 대상: 전사자 유해를 찾지 못한 친·외가 8촌 이내 유가족
  참여 방법: 보건소, 군병원, 예비군부대, 병무청, 적십자병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전화 신청: 1577-5625
  준비 서류: 제적등본, 유족증 사본, 전사통지서 사본, 병적증명서 중 택일
 
  전사자 유해 소재 제보(제보 시 최고 포상금 70만원)
  제보 대상: 6·25전쟁 당시 전사한 국군, 경찰, 학도병, 유엔군 유해
  제보 내용: 6·25전쟁 당시 전사자 직접 매장, 목격 또는 들은 내용과 생활 및 각종 공사 중 전사자 추정 유해나 유품에 대해 발견하거나 들은 경우
  전화: 1577-5625(오! 6·25)

 


 

中共軍 춘계 공세 저지한 홍천 북방 전투


 

강원 홍천 주음치리 일대 6·25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에 내걸린 현수막. 사진=영상미디어

 

 

지난 4월 28일 6·25 전사자 유해 발굴이 한창인 강원 홍천군 화촌면 주음치리를 찾았다. 수도권과 강원 양양을 잇는 서울양양고속도로에서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차를 타고 2시간을 가야 한다.
 
발굴 현장은 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거친 숨을 내쉬며 산을 탄 끝에 유해 발굴 현장인 ‘무명 560고지’에 올랐다. 고지로 향하는 길목에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70여 년 전 선배 전우들이 목숨을 걸고 오르내린 전투 현장입니다.”
 
72년 전 홍천에서는 국군 5사단과 미 육군 2사단이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1951년 4~5월)를 저지하기 위해 ‘홍천 북방 전투(1951년 5월 16~18일)’를 치렀다. 당시 중공군은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겠다는 목표로 서부 전선인 경기 파주에서부터 동부 전선인 양양·고성까지 모든 전선에 걸쳐 총공세를 폈다. 이 과정에서 국군과 미군은 홍천 북서쪽(춘천 남동향) 가리산 부근에서 중공군 제12·15군과 싸우다가 약 10km 떨어진 주음치리까지 후퇴해 방어선을 폈다. 이곳은 유엔군 3차 반격의 초석이 되어준 군사적 요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지낸 남정옥 박사는 “홍천 북방 전투는 중공군의 막대한 인해전술에 맞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 남진을 저지한 전투”라고 했다.
 
무명 560고지 일대에서는 4월 3일(6주간 실시)부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육군 11기동사단(홍천 주둔) 예하 돌격대대(대대장 이정구 중령) 장병(약 130명)들이 ‘6·25 전사자 유해발굴 작전(이하 작전)’을 시행하고 있었다. 매년 작전이 시작되면 작전 관할 지역 부대와 국유단이 협력해 유해를 발굴한다. 현장에는 야전지휘소 역할을 하는 얼룩무늬 야전텐트 주변으로 노란색 통제선이 곳곳에 쳐져 있었다. 이는 유해가 발견됐다는 표시다.
 
국유단 한정희 발굴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까지 이 지역에서 유해 총 17구를 발견했습니다. 이 중 12구를 수습했고 완전 유해는 1구입니다. 5구는 확장 노출 조사 중입니다. 유해 발굴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습니다.”
 
완전 유해는 머리뼈부터 갈비뼈, 양팔·양다리뼈가 온전히 형태를 보존한 유해를 말한다. 발굴 현장마다 차이는 있지만 유해는 ‘부분 유해’ 형태로 더 많이 발견된다.
 
부분 유해로 발견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폭발로 인해 신체 일부가 사라지거나 산짐승이 유해를 훼손한 경우다. 전쟁사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추정해 화력전이 벌어진 곳은 포격 등으로 인해 신체 일부가 찢겨나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회색 뼛조각 하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장병들은 허벅지뼈(왼쪽 아래)를 최초 발견한 후 경사면을 확장 발굴해 추가 유해를 발견했다. 사진=영상미디어

 

 

노란색 통제선 안쪽으로 길이 40cm쯤 돼 보이는 회색 뼛조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벅지뼈였다.
 
70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백골을 마주하고 든 생각은 공포감이나 혐오감이 아닌 존경심이었다. 소중한 생명을 조국에 바쳤다는 생각에 숙연해졌다.
 
허벅지 뼛조각이 발견된 곳에서 대각선 오른쪽 위로 약 5m 떨어진 경사면에선 국유단 소속 유해발굴기록병 3명이 붓을 들고는 추가 발견된 유해와 흙을 털며 ‘확장 노출’을 하고 있었다. 유해가 발견되면 최초 발견 지점을 중심으로 위·아래 2m, 좌우 2m 구역을 추가로 파내는 ‘확장 조사’를 한다. 유해를 발견하면 형태 확인을 위해 유해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노출한다.
 
한 팀장의 설명이다.
 
“최초 유해 발견 후 확장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지형을 고려해 평소보다 발굴 범위를 더 넓혔습니다. 덕분에 머리뼈 일부와 오른팔 뼈 일부, 다리뼈가 추가로 발견됐습니다. 최초 발견된 허벅지뼈는 경사면을 타고 흘러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최초 허벅지뼈가 발견된 후 추가 유해를 발견하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국유단 관계자는 “앞으로 유해를 모두 수습하기까지는 이틀 정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유해 발굴은 훼손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신중하게 진행된다. 통상 수습에는 부분 유해 3~5일, 완전 유해 7~10일이 걸린다. 유해를 모두 수습하기 전까지는 노출된 유해를 한지로 감싸고 유해 발견 구역을 방수포로 덮는다.
 
유해가 발견된 곳에서 약 2m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나무는 앙상하게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국유단·돌격대대 장병들이 선배 전우를 찾기 위해 집요하게 흙을 파냈기 때문이다.
 
100m쯤 떨어진 또 다른 경사면에서는 유해발굴기록병들이 노란색 통제선 안에서 체를 이용해 흙을 거르고 있었다. 노출된 유해를 수습한 뒤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추가 유해를 찾기 위해 주변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과정(스크리닝·screening)이다. 손가락·발가락뼈는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 미처 챙기지 못한 채 유해 수습을 끝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앞서 2010년 유해 발굴 당시 유해 9구와 개인호 약 130개, 전투 유품 등을 발굴한 곳이다. 10년이 흘러 다시 땅을 파니 유해가 추가로 발견되고 있었다.
 
 

 


 

유해 발굴 따른 포상 등 없어
 
50m쯤 떨어진 고지에서는 돌격대대 장병 약 30명이 가로로 줄지어 늘어선 뒤 경사면을 따라 기초 발굴을 하고 있었다. 기초 발굴은 삽을 들고 땅을 뒤엎으며 유품이나 유해 흔적을 찾는 과정이다. 돌격대대 장병들이 무언가를 발견하면 전문지식을 갖춘 국유단 장병이 투입된다.
 
유해발굴기록병인 서지원 병장은 사학을 전공했다. 전공을 살리며 의미 있는 군 생활을 하고자 국유단에 지원했다.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발굴된 전사자 유해가 신원이 확인돼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라고 했다. 국유단에서 복무하는 병사들은 모두 지원병이다. 국유단 전체 인원 약 300명 중 약 160명(유해발굴기록병·유해발굴감식병·영현병)을 차지한다.
 
돌격대대 장병들이 지나간 곳은 낙엽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뿌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나무와 흙, 돌무더기뿐이었다. 돌격대대 장병들은 흙먼지를 들이마시며 선배 전우를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6주간 땅을 파헤치고 발굴 작전을 편다. 작전이 종료될 때쯤이면 다시 발굴 이전 모습으로 현장을 복원해놓는다. 내년에 다시 이 지역을 계속해서 추가 발굴할 예정이다.
 
발굴 현장에 투입되는 현지 부대 장병들은 대부분 부대에서 자원한 이들이다. 대대 병력(400명) 중 100여 명 규모로 선발해 작전에 투입된다. 오전 9시부터 시작해 오후 4시30분까지 작전을 편다. 식사는 도시락으로 대신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장병 10여 명이 고지 아래로 내려가 10kg이 넘는 도시락 가방을 다시 메고 산을 오른다. 도시락 가방을 등에 멘 한 장병은 “하나도 힘들지 않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작전에 참여한 장병들이 유해를 찾는다고 해서 휴가나 외출 같은 포상이나 대가를 얻는 것은 없다. 대신 기초 발굴로 유해를 발견한 장병에게는 전사자 유해가 모두 수습된 후 봉송할 기회를 준다. 발굴 작전에 임하는 현지 부대 장병들은 주둔지 생활관의 평범하고도 편한 일과를 포기하고 선배 전우의 유해를 찾겠다는 전우애와 사명감으로 고생을 자처했다.
 
 

 

  “6주 동안 삽질, 쉬운 일 아니다”
 

11기동사단 돌격대대 장병들이 삽으로 산을 파헤치고 있다. 사진=영상미디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올해 30개 사·여단을 동원해 36곳에서 유해 발굴을 할 계획이다. 발굴 기간은 통상 3~6주다. 동원사단(예비군부대)은 3~4주, 그 외 부대는 6주다. 해당 부대의 사정과 훈련 일정을 고려해 발굴 일정을 정한다.
 
발굴 작전이 6주밖에 되지 않아 선뜻 ‘짧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군 관계자는 “6주 동안 하루 종일 삽질만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고 했다.
 
돌격대대 김도훈 상병은 “무엇이든 하나라도 발견했을 때 가장 보람 있다”고 말했다. 탄피나 군화 밑창, 인식표(군번줄) 등이 발견되면 근처에 유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상병은 “발굴 작전 중 다치는 일도 있지만, 부대 장병들은 선배들의 흔적을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노력한다”며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임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군인지 적군인지는 어떻게 판단할까. 국유단 관계자의 설명이다.
 
“발견된 유해가 완벽하게 적군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한 국군으로 추정합니다. 대체로 우리 군이 패배한 곳에서는 아군 전사자 시신 수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군이냐, 적군이냐’ 구분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국군으로 추정되는 유해에서 적군 유품이 발견되고 적군 추정 유해에서 국군 유품이 발견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전선 지역은 보급이 열악했기에 영화 〈고지전〉에 나온 것처럼 피아간 물품을 서로 뺏고 빼앗았습니다. 아군이 적군 옷을 입고, 적군이 아군 옷을 입고 싸웠습니다. 국유단은 피아판정위원회를 열고 3~4단계의 심의를 거쳐 최종 판단합니다.”
 
 

 

  최초 발견 장병이 유해 봉송
 

수습된 유해가 오동나무관에 담겨 봉송되고 있다. 11사단 돌격대대·국방부 유해감식단 장병들이 도열해 경례하고 있다. 사진=영상미디어

 

 

 

수습된 유해는 현장에서 임시 감식을 마친 후에 한지로 감싼다. 한지로 감싼 유해는 오동나무관에 입관하는데 신체 위치에 맞게 유해를 배치한다. 입관을 마치면 6·25 전사자의 관을 의미하는 빨간 천으로 관을 덮고 여기에 태극기를 감싼다. 이를 ‘태극기 관포(棺包)’라고 한다.
 
태극기로 감싼 오동나무관은 태극기를 병풍 삼아 현장에서 약식제례를 했다. 이정구 대대장은 오동나무관 아래 놓인 제례상에서 청주를 따라 올렸다. 시계 방향으로 잔을 세 번 돌리고는 관 뒤편에 세 번에 걸쳐 술을 부었다.
 
약식제례를 마치자 유해 발굴 작전에 참여한 돌격대대 병사가 전투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하얀 천을 목에 걸친 채 오동나무관을 가슴에 품었다. 국유단 관계자는 봉송 장병에게 “경사가 급하니 조심하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후배 전우 품에 안겨 72년 만에 고지를 떠나는 선배 전우를 향해 돌격대대 부대원들과 국유단 장병들은 좌우로 도열해 경례를 했다. 유해는 군사경찰(헌병)의 호위를 받아 11기동사단 임시봉안소로 옮겨졌다.
 
이 대대장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배 전우들을 책임지고 가족과 조국의 품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다.
 
임시봉안소에 안치된 관은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국유단 중앙감식소에서 정밀 감식을 받고 봉안된다. 신원이 확인되면 현충원이나 고인의 선산에 안장된다.
 
  중앙감식소로 이동한 유해는 정밀 감식과 함께 신원 확인을 위해 DNA 검사를 한다. DNA 검사를 위한 시료 채취는 보존 상태가 가장 나은 부위를 절단해 실시한다. 절단 크기는 부위마다 다르다. DNA 분석에는 1~2개월이 걸린다.
 
현장에서 발굴한 유해를 바탕으로 전사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선 전사자 유가족의 DNA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발굴 당시 전사자를 특정할 수 있는 유품이 없으면 국유단이 확보한 유가족 DNA 정보를 바탕으로 DNA 염기서열을 대조하는 방법이 유일한 신원 확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6·25 전사자의 신원 확인을 위한 유전자 시료 채취 대상은 전사자 유해를 찾지 못한 친·외가 8촌 이내 유가족이다. 하지만 촌수가 멀어질수록 신원 확인율은 떨어진다. 2022년을 기준으로 신원이 확인된 6·25 전사자 204명 중 유가족 DNA 채취를 통해 가족관계를 증명한 사례는 총 182건이다. ▲1촌(전사자의 자녀) 77건 ▲2촌(전사자의 형제자매, 손자) 84건 ▲3촌(조카) 19건 ▲4촌 1건(사촌동생) ▲5촌 1건(당질)이다. 유가족 정보는 없지만 제보나 묘비, 개인 식별 유품 등을 통해 신원을 확인한 사례도 22건이다.
 
세대가 멀어질수록 신원 확인 비율이 떨어지는 점(4촌 1건, 5촌 1건)은 어떻게 해결할까. 국유단 관계자는 “촌수가 멀어질수록 신원 확인 건수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면서 “기술적인 제한도 영향을 미친다. 관련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신원이 확인 가능한 촌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고 밝혔다.
 
 


신속 기동탐문반 운영, 신원 확인 늘어
 
국유단에서는 유가족으로 추정되는 이들 중 부계(父系)·모계(母系) 각각 2명에 대한 DNA를 채취한다. 4명이나 채취하는 이유는 발굴된 유해와 유가족 간의 가족관계·성별에 따라 적용 가능한 검사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최대한 많은 유가족 정보를 확보해 신원 확인율을 높이려는 시도이다. DNA를 이용한 신원 확인은 대표적으로 3가지 방식이 있다. ▲미토콘드리아 염색체(모계 유전) ▲Y염색체(부계 유전) ▲상염색체다.
 
일란성 쌍둥이가 모두 참전해 전사한 뒤 시간이 한참 흘러 유해만 발견됐다면 이들의 신원은 어떻게 확인할까. 이 경우는 DNA만으로 신원을 파악할 수 없어 병적(兵籍) 등 관련 자료를 확인해 증거를 바탕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발굴된 전사자의 유해 정보와 전사자 유가족의 가족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기술에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국유단은 유가족 DNA 시료 채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향후 유전 정보 분석 기술이 발전하면 확보한 유가족 DNA 정보를 바탕으로 더 많은 전사자 유해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유단은 유해를 찾지 못한 6·25 전사자의 유가족 DNA를 확보하기 위해 ‘신속 기동탐문반’을 운영하고 있다. 기동탐문반은 6·25 전사자의 유가족 주소지를 직접 찾아가 유전자 시료를 채취한다. 탐문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사자의 병적 기록, 유가족 관련 문서 등을 분석한 후 행정관서의 제적 정보를 파악한다. 6·25전쟁 당시에는 병적기록과 호적 등 행정 체계가 미비했다. 남아 있는 기록 또한 한자 초서체 형태의 손글씨로 작성돼 판독이 어렵고, 병적기록과 관공서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유가족을 찾기 위해서는 탐문 담당 인력이 직접 관할 행정관서와 마을을 일일이 방문할 수밖에 없다.
 
 


‘막둥이 작은아버지’를 찾아서
 
지난 5월 1일 국유단 윤태수 팀장을 만나 기동탐문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관찰했다. 그는 이날 오후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사는 이종채(1942년생)씨를 찾았다. 이씨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고 이재근 하사의 친조카이다. 이 하사가 전사(1950년 12월 21일)한 사실은 확인했으나 아직 유해는 발견하지 못했다.
 
전남 강진에 사는 이씨의 형도 앞서 DNA 시료 채취에 응했다. 윤 팀장은 이씨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는 이씨의 입안 볼 안쪽으로 면봉을 집어넣고 바깥 방향으로 한 바퀴 저었다. 탈지면으로 침샘 아래쪽을 긁어내면 상피세포가 묻어 나온다. 이 면봉을 밀봉한 후 국유단으로 보내면 6·25 전사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새로운 정보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종채씨의 말이다.
 
“아버지의 남자 형제 중 막내라서 (나는 이재근 하사를) ‘막둥이 작은아버지’라고 불렀어요. 전쟁이 나기 전에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에 입대하셨죠. 막둥이 작은아버지를 포함해 동네에서 5~6명이 전쟁에 나갔는데 1명만 살아서 돌아왔어요. 막둥이 작은아버지가 나를 항상 예뻐하신 게 기억에 남습니다. 국방부에서 작은아버지를 찾기 위해 이렇게 관심을 두니 기분이 좋습니다.”
 
이씨는 엘리베이터까지 나와 배웅했다. 윤 팀장은 “좋은 꿈 꾸면 금방 작은아버지를 뵐 수 있을 것”이라며 “신원이 확인되면 연락드리겠다”고 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한다”
 
윤 팀장은 2019년 3월부터 유가족 탐문 활동을 해왔다. 지금까지 약 1500명을 만났고 이동거리는 15만2000km에 이른다. 일주일에 10명가량을 만난다. 그는 자신을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윤 팀장의 말이다.
 
“DNA 채취뿐만 아니라 보훈행정에서 소외된 분들을 적극적으로 도와드리는 일도 합니다. 공문서상에는 가족관계가 아니지만 탐문 활동으로 유가족임을 입증해드린 적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남편이 전사하면 아내는 재가(再嫁)를 많이 했어요. 전사자 자녀들은 호적상 큰아버지한테 입양되기도 했고요. 이 때문에 전사자 자녀들은 정부로부터 보훈 유자녀 혜택을 받지 못했죠. 하지만 저희 활동 덕분에 보훈 혜택을 보는 분도 많아졌습니다.”
 
윤 팀장은 이날 경기 하남, 노원구 상계동을 거쳐 강동구 고덕과 경기 양주로 이동해 탐문 활동을 계속했다.
 
국유단이 보유한 전사자 유가족 DNA 정보는 총 8만7367건이다. 2022년 한 해 확보한 전사자 유가족 DNA 시료(1만1279명) 중 기동탐문을 통한 시료 채취가 74.9%(8455명)를 차지한다. 2018년 4건, 2019년 7건에 불과했던 전사자 신원 확인 건수는 유가족 DNA 정보가 쌓인 덕분에 2020년 19건, 2021년 24건, 2022년 23건으로 늘었다.
 
국유단은 유가족 DNA를 확보하기 위해 그룹타기팅(역추적) 방식도 활용한다. 우선 대규모 유해 발굴 지역을 분석하고 발굴 지역에 참전한 사단과 전사자를 파악한다. 이를 바탕으로 유해가 아닌 위패로 모셔진 전사 대상자를 선정한 후 이 전사자의 병적 자료를 분석한다. 이어 행정기관 제적(除籍) 정보 시스템을 조회하고 유가족을 추적(탐문)해 시료를 채취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사자 10명에 대한 신원을 확인했다.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강원 양구 일대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DPAA가 6·25 전사자 공동조사를 했다. 사진=영상미디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미국 DPAA(Defense POW/MIA Accounting Agency,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전사자 유해 발굴 감식을 전문적으로 하는 조직이다. 2008년 8월에는 국유단과 DPAA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한미 양국은 공동 유해 발굴도 진행한다. 국유단은 우리나라에서 발굴한 미군 추정 유해를 미국 측에 인계했고 2022년을 기준으로 10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국유단과 DPAA는 지난 4월 17일부터 29일까지 국내 미군 실종자 조사 활동을 위해 한미 공동조사를 벌였다. ▲강원 양구 ▲경북 상주 ▲충남 보령 일대에서 주민 증언 수집과 탐사 활동을 했다. 이어 지난 5월 15~16일에는 국유단과 DPAA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신원확인센터에서 국내에서 발굴한 미군 추정 유해 3구를 공동 감식했다.
 
국유단 공보장교 최승준 대위는 “국유단의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호주, 벨기에, 네덜란드, 베트남, 리비아 등 여러 나라가 국유단과 협업하기 위해 찾아온다”며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라는 부대 훈(訓)을 바탕으로 유엔 참전·지원국, 주변국과도 협력해 국격 향상에도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국유단은 2014년 3월 28일 처음으로 그동안 발굴했던 중국군 추정 유해를 인도주의 차원에서 송환(유해 437구, 유품 4286점)했다.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은 지난(至難)한 시간과의 싸움이다. 앞서 소개한 이만우·이천우 형제 사례처럼 죽어서야 함께할 수 있게 된 또 다른 형제가 있다. 주인공은 고 김봉학 일병·고 김성학 하사. 동생 김성학 하사(현 계급 일병)는 8사단에 배속돼 1950년 12월 24일 강원 춘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유해를 수습한 덕분에 서울현충원에 안장(1960년 5월)됐다. 하지만 형 김봉학 일병(5사단 추정, 1950년 8월 입대)은 ‘피의 능선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다.
 
김봉학 일병의 유해는 2011년 7월(1차) 수리봉 일대에서 처음 발견됐다. 이때 머리뼈와 오른쪽 정강이뼈가 나왔다. 이어 2012년 11월(2차)과 2016년 10월(3차) 발굴에서는 1차 발굴 지점에서 20~70m 떨어진 곳에서 넙다리뼈 등을 추가로 발견해 수습했다. 김 일병은 1951년 9월 5일 강원 양구 수리봉 일대 고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투에서 포탄을 맞고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6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지난 2월 15일에야 신원이 확인됐다. 김 일병 신원은 육군 50사단 소속 예비군 지휘관이 국유단으로부터 받은 지역별 전사자 명부를 통해 고인의 친동생 김성환(81)씨를 찾아내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김씨는 “살아생전은 물론이고 죽어서도 사무치게 그리워할 형님을 뒤늦게라도 찾게 되어 꿈만 같다”며 “형님을 찾기 위해 고생하신 모든 분께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국유단 계획과장 김인수 소령은 “전사자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선배 전우들이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방안을 계속해서 마련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근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 전사자 유가족들이 DNA 시료 채취에 더 많이 동참할 수 있도록 적극 알리겠다”며 “국민 여러분 모두의 참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출처] 월간조선 (2023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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