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운전 딱지를 차에 붙이고 다니던 딸아이가 운전하면서 화가 날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읊조리며 삭이니까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부끄러움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운전대를 잡으면 분노하는 로드 레이지(road rage)는 아니었지만 분을 삭이지 못하고 큰소리로 대거리를 하거나 화를 내곤 했다. 나는 그 분노가 당당한 꾸짖음이거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분별력이거나 정의로운 자의 비판으로 여기며 내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곤 했다. 
차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내가 초보운전자였을 당시 장난기로 ‘좀 봐줘유 씨!’라고 차 뒤에 써 붙이고 다녔다. 처음 운전대를 잡은 사람들이 ‘초보운전’이라고 써 붙이는 것은 스스로 약자라는 걸 다른 운전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운전 솜씨 좋은 강자가 살펴주는 게 도리인데도 약자를 희롱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세상이 된 것 같았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약자의 서러움을 수없이 지켜보며 어찌하든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고 강한 척하며 살아온 어리석음을 지우는 데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들기 마련이라는 걸 세월이 흐르면서 깨닫게 되었다. 


스승을 찾아다니며 마음공부를 하면서 내가 스스로 위안 삼았던 강한 척했던 행위는 선비정신이나 반골기질이 아니라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 탓이란 걸 알게 되었다. 현대 최첨단 과학기술이라는 인공지능의 기억저장능력이 방대하다 해도 ‘알아차림’의 능력은 없다. 그 알아차림은 사람이 입력시켜 주어야만 가능하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스스로 깨우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타인의 시선과 관찰로 다듬어지는 알아차림이 훨씬 쉬울 것이다. 생각만큼 쉽게 알아차리거나 실행하게 되지 않았지만 세월이 나를 삼키면서 외진 길에서 운전 교습차가 느리게 내 앞을 지나가도 웃으며 느긋하게, 땀 흘리는 운전자를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었다. 
담배꽁초를 차창 밖으로 던진 운전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우리나라를 더 살기 좋은 깨끗한 나라로 같이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더러 눈을 흘기거나 “이게 당신 땅이냐”고 이죽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거개가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하기 마련이다.
공중화장실에서 습관적으로 휴지를 서너 장씩 뽑아 쓰는 사람에겐 관상이나 나이를 대충 두드린 뒤에 “여기 휴지 한 장이면 충분하다고 써 있던 종이를 제가 괜히 치웠나봅니다”라고 하면 서로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게 된다. 복잡다단한 현대의 도회지에 살면서 이게 무슨 오지랖 넓은 짓이랴만 옳지 않은 것에 침묵하는 것도 알아차림은 아닐 것이다. 


프로축구나 야구 경기를 관람하며 열성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을 부러워한다. 아들 녀석은 어려서부터 야구를 좋아해서 A야구단의 열성팬이다. 성적이 나빠도 선수나 감독이 실망시켜도 변함없이 응원한다. 며느리가 다니는 회사에도 야구단이 있지만, A야구단을 응원하게 만들고 아직 어려서 세상물정 모르는 손자까지 설득하여 A야구단 응원을 강요할 만큼 초지일관이다. 
그러나 나는 해마다 응원팀이 바뀐다. 매년 꼴찌 하는 팀을 응원하기 때문이다. 선수나 감독이 구단의 눈칫밥을 먹을 테고 팬들에게 면구스러울 것이며 기운 빠졌을 게 뻔하다. 우승한 팀을 부러워할 테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마음이 시릴 것 같아 나는 번번이 꼴찌 팀을 응원하게 된다. 어쩌면 평생 시험 봐서 일등을 한 적이 없고 시합에서도 우승한 적이 없으며 조직 속에서는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꼴찌와 약자도 대접 받는 세상을 꿈꾸고 꼴찌에게 박수치는 사람이 많기를 바라며 약자가 반드시 밝게 웃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 수 없음에도 혼자 잘 살려고 남을 깔보고 약자의 등을 치는 사람이 활개 치는 세상에, 꼴찌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 책상 앞에 이렇게 써 붙였다.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도 걸린다.”


ⓒ 홍덕선